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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8.03.25 인간의 뇌 구조(written by 유시민)
횡설수설2018. 3. 25. 14:49

수박 겉 핥기로 공부한 것을 대충 정리해 보자. 인간의 뇌는 짧게는 수백만 년, 길게 보면 40억 년 가까운 진화적 시간에 걸쳐 만들어졌다. 도시로 치면 매우 오래 된, 크고 복잡한 대도시와 같다. 파리나 베를린, 서울이나 베이징을 생각하면 된다. 이 도시들은 전체를 합리적으로 설계해서 만든 신도시가 아니다. 음침한 뒷골목에는 술집과 홍등가, 조폭의 소굴이 즐비하다. 구시가에는 중세기 권력자들의 부귀영화를 보여주는 거대한 왕궁과 사원, 오래된 석조 건물이 서 있다.

신시가지에는 권력과 지식, 현대 문명의 상징인 마천루 숲과 정부 청사 단지, 호화 주택과 문화예술센터, 도서관과 공원이 있다. 이 도시에는 야만과 문명이, 욕망과 이성이,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혼재한다.

도마뱀과 매, 토끼와 사슴, 침팬지와 고래, 진시황과 미켈란젤로, 히틀러와 테레사 수녀, 이완용과 안중근이 뒤엉켜 산다. 겉으로는 질서 정연해 보이지만 곳곳에서 격렬한 쟁투가 벌어지고 있다. 탐욕, 연민, 복수심, 질투심, 동정심, 정의감, 절망, 희망, 고통, 환희…. 내가 느끼는 모든 감정은 그 쟁투가 빚어낸 것이다.


뇌의 구조는 오래된 도시와 닮았지만 그 작동 방식을 이해하려면 지하실이 딸린 2층집을 생각하는 편이 나을 듯하다. 지하실은 뇌간이다. 척수 바로 위 대뇌 아래에 있는 뇌간은 파충류의 뇌와 비슷하다고 한다. 뇌간은 의식하지 않아도 되는 생명활동을 담당한다. '위가 비면 배가 고파진다. 땀을 흘리면 목이 마르다. 배우지 않아도 음식을 씹고 물을 마실 수 있다. 소화는 위장이 알아서 한다. 마음먹지 않아도 숨을 쉰다. 가시에 찔리면 아프다. 돌이 날아오면 나도 모르게 몸을 움츠린다.' 이런 일들은 도마뱀도 다 한다. 그러나 도마뱀 이 하지 못하는 일이 있다. 도마뱀은 새끼를 다정하게 껴안아 핥아주지 않는다. 먹이를 다른 도마뱀과 나누어 먹지 않는다. 뇌의 지하실에는 살아가는 데는 꼭 필요하지만 남에게 내놓고 자랑하기는 좀 곤란한 것들이 들어 있다고 보면 되겠다.


뇌의 1층은 변연계(邊緣系; limbic system)이다. 변연계는 대뇌피질 아래에서 뇌간을 둘러싸고 있다. 여기에는 방이 여럿 있다. '편도'는 감정을 조절한다. '해마'는 기억을 저장한다. '시상하부'는 호르몬 분비를 조절한다. '기저핵'은 운동을 제어한다. 변연계는 오리너구리 같은 원시 포유류 단계에서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파충류 시절에 지은 지하실 위에 한 층을 더 올린 것이다. 변연계는 특히 짝짓기를 할 때 맹활약을 한다. 사랑에 빠진 연인들의 뇌에서 강한 활성도를 나타낸다. 나로서는 이름과 얼굴을 구별하는 게 불가능한 걸그룹 멤버들이 춤추면서 노래할 때 텔레비전 화면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것도 변연계의 활약 때문이다.


뇌의 2층은 대뇌피질(大腦皮質; cerebral cortex)이다. 대뇌피질은 교양 있는 지식인의 거실이라고 생각하면 적당할 것이다. 서가에는 세계문학전집이나 최신 베스트셀러 교양서가 꽂혀 있다. 개인용 컴퓨터와 홈시어터, 전화기, 안락한 소파, 해가 잘 드는 커다란 창이 있고 벽에는 렘브란트의 그림이 결렀다. 실내에는 감미로운 음악이 흐르고 커피향이 은은하게 감돈다. 대뇌피질은 가장 높이 진화한 고등 포유류의 것이다. 포유류 중에도 침팬지를 비롯한 영장류가 가장 발달한 대뇌피질을 보유하고 있다.


인간은 포유류 중에서도 단연 비대한 대뇌피질을 자랑한다. 인간 뇌의 무게는 약 1.4킬로그램 정도 되는데, 80퍼센트가 대뇌피질이다. 회백색인 피질은 대뇌를 밖에서 둘러싸고 있다. 가장 중요한 부위이기 때문에 단단한 두개골의 보호를 받는다. 단어를 물건과 연관 짓고, 타인과의 관계를 형성하며, 과거를 비판적으로 성찰하고 미래를 전망하면서 현재의 삶을 설계하는 고도의 지적(知的) 기능을 담당하는 곳이 바로 대뇌피질이다.







스캔 장비가 없었지만 프로이트는 뇌의 구조와 작동 방식을 대충 짐작했던 것 같다. 무의식 속에서 오로지 욕망을 따르고 고통을 피하려고만 하는 '이드'는 뇌의 지하실과 1층을 오르내리며 산다. 양심과 이상을 추구하는 '슈퍼에고'는 2층 거실에 기거한다. '에고'는 서로 대립하면서 공존하는 '이드'와 '슈퍼 에고'의 번증법적 통일이다. '이드'는 호시탐탐 '슈퍼에고'의 통제에서 벗어날 기회를 노린다. '이드'가 탈출에 성공하면 사람은 앞뒤를 가리지 않는 욕망과 충동에 휩쓸린다. 그리고 강간) 폭행, 살인과 같은 범죄를 저지른다. '슈퍼에고'가 제 기능을 하지 못하면 타인과 공감하지 못하는 자폐 증세가 생기거나 사이코패스가 탄생한다. 이런 현상이 어떤 이유에서 대중에게 전염되면 히틀러의 홀로코스트, 스탈린의 대숙청, 마오쩌둥의 문화대혁명, 크메르 루즈의 킬링 필드와 같은 참사가 벌어저 죽음이 강처럼 흐르고 문명이 잿더미가 된다. 생물학적 견지에서 보면 문명은 인간의 대뇌피질이 만든 것이다. 문명은 대뇌피질이 변연계와 뇌간에 대한 관리 통제를 강화하는 데 성공하는 만큼 발전했다. 문명이 억압이라는 맡에는 분명 일리가 있다.

삶은 욕망(色)과 규범(刑)의 충돌이라는 말에는 나는 공감한다. 나는 주로 규범의 세계에서 살면서 남들한테 욕을 먹지 않을 만큼만 욕망의 세계를 넘나들었다. 이리면 안될 텐데, 늘 자책하면서. 그렇게 산 것을 후회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남은 삶을 어떻게 사느냐는 것은 또 다른 문제이다. 최선을 다해 살았다고 해서 계속 지금까지 살았던 것처럼 살아야 하는 건 아니다. 내게는 매순간 미래의 삶을 새로 설계하고 새로운 도전을 할 권리가 있다. 물론 욕망을 충족하는 것보다는 규범을 따르는 삶이 더 훌륭할 수 있다. 개인을 중심에 놓고 생각할 때 최고의 도덕적 이상은 이타성(unselfishness)이라는 라인홀드 니버의 말이 옳다고도 본다. 그러나 이타성이라는 이상을 추구하는 것도 스스로 세운 준칙에 따른 행위일 때 기쁨이 되지 않겠는가. 욕망을 억압하면서 규범을 따르는 일이 참기 어려울 만큼 어색하고 불편하고 고통스럽게 느껴 진다면 욕망을 표출할 수 있는 문을 더 넓게 열어주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한다. 규범은 자기 자신이 기쁜 마음으로 자연스럽게 감당할 수 있는 만큼만 따르면 된다. -유시민의 <어떻게 살 것인가>-


Posted by 대단한 조르바